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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동아마라톤 참가기

해군52 2002. 3. 20. 15:00

지난 주 내내 머리 속에는 온통 동아마라톤 생각뿐이었다. 2002. 3. 17(일)에 열리는 제73회 동아 서울 국제마라톤 대회! 광화문을 출발해서 용산-종각-동대문-신설동-군자교-어린이대공원-광진구청-잠실대교-천호사거리-길동사거리-올림픽공원-수서-잠실주경기장에 이르는 42.195키로의 코스! 토요일 밤, 동아마라톤 생각에 잠을 설쳤다.

 

드디어 일요일 아침! 2000. 6월 양평하프마라톤 이후 1년 9개월만에 처음 출전하는 공식대회. 2000년 하프코스 완주, 2001년에는 광화문에서 동대문까지 5키로를 그냥 묻어 뛰었던 바로 그 동아마라톤 출발점인 광화문에 다시 섰다. 그간의 부상을 딛고 다시 일어나 이번에는 새로운 풀코스에 도전하다니... 벅찬 감회를 억누르며 1만2천여명의 참가자들 가운데에서 운동화 끈을 매면서 오늘의 완주를 다짐했다. 목표 기록은 4시간!

 

10시 정각, 총성과 함께 드디어 출발. 모두들 환호성을 올리며 힘차게 발을 내딛는다. 함께 있던 친구들은 곧 보이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나 혼자만의 고독한 레이스다. 사람들에 밀려 가다보니 어느새 시청을 지나 남대문이다. 서울역을 지나 갈월동에 이르니 프로선수들이 벌써 용산 5키로 반환점을 돌아 지나가고 있다. 5키로 지점 통과 시간 23분. 용산까지 약간의 내리막길에서 흥분한 김에 오버페이스한 듯하다. 후반을 위해 속도를 줄이자.

 

용산 반환점을 돌아오는 길은 반대로 약간 오르막, 좀 힘이 든다. 서울역, 남대문을 지나 종로로 들어선다. 10키로 지점 통과 시간 52분. 3번째 뛰어보는 종로거리는 여전히 반갑다. 곧게 뻗은 대로를 달리다 보니 어느새 동대문, 신설동을 지난다. 박수를 치며 응원을 하는 거리의 많은 시민들을 보니 힘이 솟는다. 15키로 지점 통과 시간 1시간 27분. 잘 가고 있다.

 

답십리 지하차도를 지나고 나니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하지만 몸이 잘 풀려서인지 그리 힘들지 않게 가고 있다. 이대로 전반부만 잘 뛰어준다면 오늘 레이스는 성공이다. 초반 오버페이스한 사람들이 쳐지기 시작한다. 대부분이 30대 초반으로 보인다. 젊은 시절 기분으로 준비 없이 나온 탓일 게다. 과욕은 절대 금물이다. 드디어 20키로 지점 통과, 1시간 55분. 전반부 레이스는 아주 성공적이다. 좀 힘이 들지만 이제 무리만 하지 않으면 되겠지. 준비한 비상식을 먹고 물도 마신다.

 

비상식 덕분에 다시 힘을 내서 달린다. 코스는 아주 평탄하다. 드디어 한강이 보인다. 날씨는 좋지만 강변에 이르니 바람이 더욱 강해진다. 잠시 몸이 균형을 잃으며 페이스가 떨어진다. 풀코스는 너무 무리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깨를 나란히 달리고 있는 커플을 보면서 마음을 다잡고 다시 뛰기 시작한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도 완주는 해야지. 하지만 다리가 무거워지기 시작한다. 25키로 지점 통과 시간 2시간 23분.

 

길가 쪽으로 빠져 나와 잠시 숨을 고른다. 역시 무리였나 싶다. 갈등이 커지고 있는데 길가에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친구 한 녀석이 길 모퉁이에 있다가 물통을 건네 주면서 박수를 보낸다. 친구의 응원에 다시 힘을 얻는다. 바람이 조금 약해진 듯하다. 천호사거리, 길동사거리를 지나서 드디어 30키로 지점 통과, 2시간 51분

 

몸이 점점 무거워진다. 약간의 오르막에서도 힘이 부친다. 숨은 그렇게 차지 않은데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다. 보폭을 줄여 본다. 그래도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머리 속이 텅 비어지는 것 같다. 이 힘든 상황을 빨리 끝내고 쉬고 싶은 생각 뿐이다. 한번 멈추면 다시는 뛰지 못 할 것 같다. 고통스럽게 다리를 끌며 가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잠깐 걸으면서 생각하자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걷는다. 35키로 지점 통과했지만 이제는 시간 확인하기도 귀찮다.

 

남아 있는 힘을 모두 짜내면서 달리다 보니 아파트 주민들이 교통 통제하는 전경들과 싸우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일요일 나들이하려다가 길이 막혀 있으니 화가 날 만도 하겠다. 뛰는 사람들이야 지들이 좋아서 하는 짓이지만. 이제는 내가 달리는 것이 아니라 다리가 그냥 움직여주는 것처럼 나아간다. 40키로 지점이 보인다. 하지만 이제 나라는 존재는 이미 없는 것 같다. 아무 생각도 없다.

 

드디어 골인지점인 잠실종합 운동장이 보인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모두들 사력을 다하고 있다. 먼저 들어온 사람들은 벌써 메달을 목에 걸고 가족과 함께 돌아가고 있다. 자랑스런 얼굴로 말이다. 500미터 전방, 먼저 골인한 친구가 마중을 나와 있다가 함께 뛰어 준다. 이래서 친구가 좋다. 바닥에 남아 있던 얼마 안 되는 힘을 쏟아내며 스퍼트를 해 본다.

 

경기장 바로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늘어서서 열심히 응원을 하고 있다. 가족들, 동호회원들, 직장 동료들, 이름을 불러가며 박수를 보낸다. 카메라를 들고 기다리다가 사진을 찍기도 한다. 그들 앞에서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해 달려간다. 경기장 안으로 들어서니 스탠드의 관중들이 나를 위해 환호하는 것만 같다. 열띤 환호에 손을 들어 답하면서 트랙을 돈다. 트랙의 쿠션을 느끼면서 천천히 골인라인을 향해 달린다. 그래, 이제 쉴 수 있겠다. 마지막 걸음으로 골인! 4시간 12분!

 

계속 움직이면서 몸을 풀어야 한다는 건 생각일 뿐 운동장에 주저 앉아 일어날 수가 없다.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다리를 끌고 일어나 완주메달을 받는다. 그제서야 풀코스를 완주했다는 실감을 하면서 고통이 환희로 바뀌는 놀라운 경험을 한다.

 

 

그리고, 그리고 다음 순간, 이 모든 것이 한순간의 꿈이었음을 깨닫는다. 꿈에서 깨어 보니 TV에서 동아마라톤 중계가 한창이다. 우리의 호프, 임진수 선수가 일본의 후지타, 모리시타, 스페인의 카멜, 남아공 거트 선수와 함께 선두 그룹을 형성한 채 골인지점을 향해 힘차게 뛰는 모습이 보인다.

 

 

일요일 한낮 해군의 夢中 東亞麻裸頌은 이렇게 끝이 난다.

 

 

"이달말 충주에서 5키로라도 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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