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어느 봄 흐드러지게 피었던 라일락 꽃잎이 지던 날, 병상에 있던 그 친구는 이 세상을 떠났다. 그 친구를 새 집에 묻고 오던 날, 비가 엄청나게 쏟아졌다.
그 친구는 음대에 진학해서 성악을 전공하고 싶어 했지만 부친은 그 친구의 재능을 이해하지 못하고 무조건 반대를 하셨다. 하기 싫은 입시공부를 하다가 재수, 삼수 끝에 결국 대학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 후 취직, 장사, 노가다, 그리고 구름 잡는 사업까지 어느 것 하나 그리 신통한 것이 없었다.
한번 빗나가 버린 인생은 끝내 제 길로 돌아오지 않았다. 가고 싶었던 길을 가지 못한 한 때문인지 몸마저 병이 들었다. 그 병을 고치려고 중국 연변으로, 하얼빈으로 용하다는 한의사를 찾아 헤매기도 했지만 그것마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친구는 노래를 정말 잘 불렀다. 원래 성악을 배웠으니까 테너로 부르는 클래식곡은 당연하지만 가곡, 팝송, 가요, 심지어는 뽕짝까지 여러 장르의 노래를 모두 그렇게 잘 부르는 사람을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
노래를 잘 할 뿐만 아니라 어떤 자리에서건 그 자리에 어울리는 노래로 분위기를 만드는 재주는 천부적이었다. 그 친구가 원하는 대로 성악가가 되었거나 아니면 노래하는 엔터테이너가 되었더라면 본인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즐거웠을 텐데...
친구 부모님들의 회갑이나 칠순 잔치에서는 언제나 그 친구가 인기 최고였다. 무대에 서면 첫 곡으로 ‘삼다도 소식’이나 ‘봄날은 간다’를 부른다. 그것도 여자 키에 여자 목소리로 말이다. 손님들은 처음에는 멍하니 보고 있다가 1절이 끝날 때쯤이면 환호성을 올리며 앙코르를 외친다.
어떤 어른들은 무대까지 쫓아나와서 신체 부위를 더듬어 보며 남자인지를 확인한다. 다음 곡은 테너 음성으로 ‘오 솔레미오’ 같은 묵직한 노래를 부른다. 그러고 나면 가곡, 가요, 뽕짝 등등 완전 독무대가 된다.
신라 호텔 볼룸에서 있었던 어느 친구 부모님 금혼식 행사에서는 서*석, 김*환 같은 기성 가수들 다음에 그 친구가 노래를 했는데 그 큰 홀이 완전 뒤집어졌다. 박수, 환호성, 앙코르 요청에 파묻혔으니 먼저 노래한 가수들은 그냥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이태영 여사가 자기가 주관하는 여성교육 행사에 와서 조영남 대신 노래를 해 달라고 부탁을 하기도 했다.
내가 30대 후반에 처음으로 인생의 쓴맛을 톡톡히 보고 있을 때 그 친구가 전화를 했다.
"너 망한 기념으로 술 살 테니까 나와라."
이렇게 해서 그 친구와 둘이 ‘내가 망한 기념으로’ 신사동 어느 룸살롱에서 술을 마시게 되었다. 둘 다 술보다는 노래를 좋아하는지라 곧 노래판이 벌어졌다. 그 집에서 제일 실력있는 기타맨의 반주에 맞춰 부른 노래 중에 몇 곡이 담긴 테이프를 아직도 갖고 있다. 내 노래야 별거 아니지만 그 친구가 부른 노래 ‘Mr. Lonely’, ‘Unchained Melody’, 그리고 ‘O Sole Mio’는 언제 들어도 좋다.
그 친구와 나는 가라오케에서 노래를 엄청 부르고 다녔다. 박인수와 이동원이 듀엣으로 부른 ‘향수’가 우리의 주 레파토리였다. 박수도 많이 받았고 공짜 술도 꽤 마셨다. 사실 나야 들러리이고 모두 그 친구 덕분이었다. 요즘도 친구들끼리 노래하러 가면 첫 곡은 그 친구가 즐겨 부르던 노래를 내가 대신 부르곤 한다.
그 친구가 어젯밤 꿈에 나타났다. 병색이 짙은 얼굴로 다가와서 내 양복 주머니에 무언가 넣어 주었다. 그리고는 사람들 많은 곳을 함께 돌아다녔다. 그 친구가 사라지고 나서 생각해 보니 얼마 전 꿈에 나타나서 호두를 주겠다고 한 말이 기억났다. 주머니를 만져보니 호두가 세 개 들어있었다. 꿈속에서 또 꿈을 꾸었나 보다.
잠에서 깨어나 생각해 보니 참 이상한 일이었다. 꿈을 잘 꾸지 않는데 꿈을 꾼 것부터, 꿈속에서 꿈을 꾼 것도, 요즘 그 친구 생각을 별로 하지 않았는데 꿈에 나타난 것도, 그리고 호두를 준 것도 모두 이상했다. 무슨 일일까?
오전에 급한 일만 서둘러 마치고 벽제에 있는 그 친구를 찾아갔다. 소주 한잔 따라 놓고 절을 하는데도 그 친구는 말이 없었다. 그냥 내가 보고 싶었나 보다.
==> 나일환, 'Mr. Lonely' 노래 듣기!
주 : 그 친구가 세상을 떠난 1997년 이후 10년 동안 5월이 되면 벽제를 찾아가곤 했다. 그 친구의 노래를 요즘도 가끔 들어보는데 노래하던 장면이 너무도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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