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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간 친구

해군52 2002. 2. 16. 14:55

5년전 어느 봄 흐드러지게 피었던 라일락 꽃잎이 지던 날, 병상에 있던 그 친구는 이 세상을 떠났다. 그 친구를 새 집에 묻고 오던 날 비가 엄청나게 내렸다.

 

그 친구는 음대에 진학해서 성악을 전공하고 싶어 했지만 부친은 그 친구의 재능을 이해하지 못하고 무조건 반대를 하셨다. 하기 싫은 입시공부를 하다가 재수, 삼수 끝에 결국 대학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후 취직, 장사, 노가다, 그리고 구름잡는 사업까지 어느 것 하나 그리 신통한 것이 없었다.

 

한번 빗나가 버린 인생은 끝내 제 길로 돌아오지 않았다. 가고 싶었던 길을 가지 못한 한 때문인지 몸마저 병이 들었다. 그 병을 고치려고 중국 연변으로, 할빈으로 용하다는 한의사를 찾아 헤매기도 했지만 그것마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친구는 정말 노래를 잘 불렀다. 원래 성악을 배웠으니까 테너로 부르는 크라식곡은 말할 것도 없고 가곡, 팝송, 가요, 심지어는 뽕짝까지 여러 장르의 노래를 그렇게 잘 부르는 사람을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

 

노래를 잘 할 뿐만 아니라 어떤 자리에서건 그 자리에 어울리는 노래로 분위기를 만드는 재주는 천부적이었다. 그 친구가 원하는 대로 성악가가 되었거나 아니면 노래하는 엔터테이너가 되었더라면 본인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즐거웠을텐데 ...

 

친구 부모님들의 회갑이나 칠순 잔치에서는 언제나 그 친구가 인기 캡이었다. 무대에 서면 첫곡으로 <삼다도 소식>이나 <봄날은 간다>를 부른다. 그것도 여자 키에 여자 목소리로 말이다. 손님들은 처음에는 멍하니 보고 있다가 1절이 끝날 때쯤이면 환호성을 올리며 앵콜을 청한다.

 

어떤 어른들은 무대로 쫓아나와서 신체 부위를 더듬어 보며 남자인지를 확인한다. 다음 곡은 테너 음성으로 <오 솔레미오> 같은 묵직한 노래를 부른다. 그러고 나면 가곡, 가요, 뽕짝 등등 완전 독무대가 된다.

 

신라 호텔 볼룸에서 있었던 어느 친구 부모님 금혼식 행사에서는 서*석, 김*환 같은 기성 가수들 다음에 그 친구가 노래를 했는데 그 큰 홀이 완전 뒤집어졌다. 박수, 환호성, 앵콜 요청에 파묻혔으니 먼저 노래한 가수들이 김이 좀 샜을 거다,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이태영 여사가 자기가 주관하는 여성교육 행사에 와서 조영남 대신 노래를 해 달라고 부탁을 하기도 했다.

 

 

내가 처음으로 등기부에 이름을 올렸던 집을 날리고 난 후 어느날 그 친구가 전화를 했다.

 

"너 망한 기념으로 술 살테니까 나와라."

 

이렇게 해서 그 친구와 둘이 <내가 망한 기념으로> 신사동 어느 룸사롱에서 술을 마시게 되었다. 둘다 술보다는 노래를 좋아하는지라 곧 노래판이 벌어졌다. 그 집에서 제일 실력있는 기타맨의 반주에 맞춰 부른 노래 중에 몇곡이 담긴 테이프를 아직도 갖고 있다. 내 노래야 별거 아니지만 그 친구가 부른 노래 Mr. Lonely, Unchained Melody, 그리고 O Sole Mio는 언제 들어도 좋다.

 

그 친구와 나는 가라오케에서 노래를 엄청 부르고 다녔다. 박인수, 이동원이 듀엣으로 불렀던 <향수>가 함께 부르던 주 레파토리였다. 박수도 많이 받았고 공짜 술도 꽤 마셨다. 사실 나야 들러리이고 모두 그 친구 덕분이었다. 지금도 친구들끼리 노래하러 가면 첫곡은 그 친구 노래를 대신 부른다.

 

그 친구가 어젯밤 꿈에 나타났다. 병색이 짙은 얼굴로 다가와서 내 양복 주머니에 무언가 넣어 주었다. 그리고는 사람들 많은 곳을 함께 돌아다녔다. 그 친구가 사라지고 나서 생각해 보니 얼마전 꿈에 나타나서 호두를 주겠다고 한 말이 기억났다. 주머니를 만져보니 호두가 세 개 들어있었다. 꿈 속에서 또 꿈을 꾸었나 보다.

 

잠에서 깨어나 생각해 보니 참 이상한 일이었다. 꿈을 잘 꾸지 않는데 꿈을 꾼 것부터, 꿈 속에서 꿈을 꾼 것도, 요즘 그 친구 생각을 별로 하질 않았는데 꿈에 나타난 것도, 그리고 호두를 준 것도 모두 이상했다. 무슨 일일까?

 

오전에 급한 일만 서둘러 마치고 벽제에 있는 그 친구 집을 찾았다. 소주 한잔 따라 놓고 절을 하는데도 그 친구는 말이 없었다. 그냥 내가 보고싶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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