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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사스반 두목 선생님 (2002.0515)

해군52 2002. 5. 15. 15:14

 

중학교 3학년 3, 그 반은 한마디로 텍사스반이었다. 패싸움이 나든가 여하튼 크고 작은 말썽이란 말썽에는 3반에서 제일 많은 숫자가 걸렸으니 3반은 선생님들이 항시 주목하는 요주의 반이었다.

 

3학년 3반의 담임은 상업을 가르치는 33세의 홍선생님이었다선생님은 마른 몸매에 훤칠한 키, 자칭 미남이라고 주장하지만 절대 미남일 수 없는 그런 얼굴로 텍사스 반을 평정한 우리의 두목 선생님이었다.

 

급하면 사정없이 날아드는 알밤 세례, 까까머리에 대고 문질러 대는 주판, 칠판 위쪽에 위치한 대걸레 자루, 이런 것들이 선생님의 무기였다. 대걸레 자루를 꺼내드는 순간이면 교실 안은 정적이 감돌았고, 사정없이 몰아치는 풀스윙에는 어떤 놈도 장사가 될 수 없었다.

 

<알아서 해!>

<신중한 판단, 과감한 실천!>

 

선생님의 슬로건은 언제나 이처럼 단순 명료했다. 자질구레한 일에는 신경 쓰지 않으셨지만 치사하거나 비겁한 행동은 절대 용서하지 못하셨다당신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하시면 누구에게든 굽히지 않으셨다. 교무주임이나 학생주임 같은 고참 선생님들과 책상을 엎어가면서 싸운 일도 많이 있었다는 소문이었다중학생 배창호 감독이 몰래 극장에 갔다가 적발되었을 때 선생님이 앞장서서 그를 구제하셨다.

 

당시에는 중고등학교가 같이 있어도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보던 때였다. 시험에서 떨어지면 같은 교정에 있는 고등학교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입학시험 바로 전날 선생님의 작전명령 역시 단순 명료했다.

 

<들키지만 않는다면 컨닝도 불사한다!>

 

시험 결과 전체 8개 반 평균 합격률 55%, 3반이 합격률 65%1! 텍사스반의 1등은 선생님의 작품이었다.

 

우리가 졸업하고 나서 선생님은 교직을 떠나셨다. 그리고 얼마 후 한 장의 엽서가 내게 날아왔다. 당시 경부고속도로 건설 현장에서 온 엽서였다. 선생님은 트럭 한 대로 공사 현장에 뛰어들어 사업을 시작하셨고, 그 후 부동산 개발붐을 정확히 읽어내서 상당한 규모의 사업을 일으키셨다. 그때 그 엽서를 나는 아직 간직하고 있다.

 

나는 선생님께 결혼식 주례를 부탁드렸고, 선생님께서는 흔쾌히 맡아주셨다. 그때 선생님이 하신 주례사의 요지 또한 단순 명료했다.

 

<밑질 줄 아는 사람이 되라!>

 

선생님은 강원도 산골 깡촌에서 가난한 농부의 맏아들로 태어나서 고학으로 어렵게 학업을 마치셨지만 지금은 그 분이 야간으로 겨우 졸업하셨던 그 대학의 총동문회장이 되셨다. 그리고 그 산골에 아직도 살고 있는 어릴 적 친구들을 찾아 만나고, 모교 후배들을 위한 장학사업도 하고 계시다. 언젠가는 고향 마을의 이장이 돼서 마을 사람들의 심부름을 하고 싶다는 아주 소박한 꿈을 이야기하신다.

 

스승의 날을 맞아 당시 말썽꾼들을 모아서 선생님을 찾아뵈려던 계획은 올해에도 실행하지는 못했다. 그저 아침에 전화 한번 드렸고, 여러 놈들에게도 전화라도 드리라고 했는데 그놈들이 제대로 했는지 모르겠다.

 

* 주 : 중학교 졸업 50주년 반창회를 열게 만드셨던 선생님은 2년 전 봄날 하늘의 별이 되셨다. 어디서든 활기 넘치는 생을 시작하셨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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