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산에 가는 맛에 푸욱 빠져들던 10년 전쯤 어느 여름밤의 일이라네.
북한산은 쉽게 갈 수 있기도 하고, 다양한 코스를 즐길 수 있어서 자주 다니다 보니 거의 100번쯤은 가지 않았나 싶네. 원래 국립공원지역은 야간산행이 금지되어 있지만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거 아닌가? 해서 여름이면 가끔씩 해저물녘에 올라가서 서울 야경을 바라보다가 하산하곤 했었지. 어둠 속에서 달빛을 벗삼아 바람소리, 물소리, 숲소리를 듣다보면 신선이 되는 기분이었지.
그날도 어김없이 구기동에서 사자능선으로 혼자 올라가는데 초입에 있는 당집에서 굿을 하고 있더군. 가끔씩 그런 걸 들었기에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지. 걸음을 빨리해서 어느 만큼 올라갔는데 어둠 속에서 어슴푸레 앞서가는 사람이 보이더군. 반갑기도 하고 신경 쓰이기도 하고 그러더군. 어둠 속이라 잘 몰랐었는데 좀 더 가다보니까 검은 등산복을 입었는데 뒷모습이 젊은 여자더라고. 힐끔 뒤를 돌아보는데 눈매가 날카로워 보이더라고. 이 밤에 혼자 산에 오다니, 요즘에는 용감한 여자들이 참 많다고 생각하면서 그냥 갔지.
그런데 얼마쯤 가다가 보니까 어느 틈에 사라졌는지 안 보이더라고. 좀 서운하긴 했지만 다른 길로 가 버렸나 생각하고 한참을 가다 보니 갈림길에서 뒷모습이 슬쩍 보이더니 다시 앞서 가는데 가는 길이 좀 이상하더라고. 사자능선에서 보현봉 쪽으로 올라가는데 보통 대낮에도 잘 가지 않는 가파른 길 쪽으로 가더라고. 밤에 혼자 산에 올 정도면 보통 실력이 아닐 테고 올라가는 폼으로 보아서도 상당한 수준인 것 같긴 한데 혹시 길을 잘 몰라서 그런가 하는 생각도 했었지. 그렇다고 쫓아가서 물어보거나 말릴 수도 없어서 그냥 따라가 보았지.
가면서 생각해 보니까 암만 보아도 그쪽으로 가면 가파른 벼랑길이더라고. 그런데 앞서가던 그 여자가 안 보이다가 다시 나타나서 뒤를 돌아보고 몇 번을 그러더니 어느 순간 바로 앞에 나타나더라고. 내가 오히려 깜짝 놀라는데 그 여자가 손을 내밀더라고.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그 손을 잡았더니 그때 여름밤이었는데 아주 차가운 감촉이더라고.
그러더니 그 여자가 아무 말도 없이 다시 앞서 가는데 꼼짝없이 따라갔지. 헌데 말이지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리더라고. 어~잉! 어디로 갔지? 날아가 버렸나? 달빛 속에서 사방을 둘러보다가 아차 하는 순간 내 몸이 미끄러져 내렸고 그러다가 배낭이 나무에 걸리면서 정지되었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발밑은 시커멓게 보이는 벼랑이더라고. 등골이 서늘해지면서 머리칼이 쭈삣하더구만.
겨우겨우 몸을 추스르고 나무뿌리, 바위틈을 더듬으면서 기어올라 와서는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바로 하산했지. 그때 하산 시간을 쟀더라면 아마도 신기록감이었겠지.
능선 입구까지 거의 내려왔는데 당집에서 굿을 하던 사람들인지 여러 명이 나오더라고.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다 보니까 그 중 한 사람이 큰 사진을 들고 있는데 불빛에 비치는 사진을 보는 순간 나 기절할 뻔했지. 아까 산에서 보던 바로 그 얼굴이더란 말이지. 어둠 속에서 보긴 했지만 윤곽이 틀림없이 바로 그 여자더란 말이지.
다시 한 번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더만. 아무 말도 못하고 그 사람들을 앞서서 구기동으로 내려오는데 그 짧은 거리가 왜 그리도 멀었는지.
나 그 다음에는 누가 뭐라 꼬셔도 야간 산행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네. 한밤에 내려다보던 서울 야경을 보고 싶어도, 반딧불이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절대 사양이네.
이거 뻥 아니냐고?
뭐, 그런 걸 물어보고 그러나!
주: 사진까지 있는 걸 보면 사실일 것 같기도 한데 그 상황에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까?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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