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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에 가다

해군52 2008. 10. 4. 21:46

지난 9월에는 몇 번씩이나 병원 신세를 지더니

10월에는 첫날부터 마침내 교도소 신세까지 졌습니다

그렇다고 철장 안으로 잡혀 들어갔던 건 아니고
한때 잘 나가던 고위공직자였다가 정치권에 드나들면서
정치자금 문제로 교도소에 들어가 있는 친구를 면회했습니다

꽤나 긴 세월을 교도소에서 보내고 있는 그 친구를 만나면
무슨 말로 위로를 해야 할지 고민하면서 면회실에 들어섰는데
먼저 와 있던 그 친구는 함박웃음을 터뜨리면서 안부를 묻더니
자신의 이야기를 마치 남의 말 하듯이 아주 쉽게 좔좔 해대고
면회하러 간 우리 일행은 주로 듣기만 했습니다

그 친구가 아주 건강해 보여서 무엇보다 다행스러웠습니다
바캉스 다녀온 것처럼 구리빛으로 탄 얼굴에
헬스클럽에 오래 다닌 사람처럼 건장해 보이는 모습이
오래전 밖에서 만났을 때보다 더 밝고 환해 보였습니다

처음 구속되어 구치소에 들어갔을 때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양심적으로 크게 잘못한 건 없지만 법을 위반했으니
그에 따른 처벌은 내가 당연히 감수해야 할 일이다’

그랬더니 마음이 편하더랍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형기가 끝나고 나가는 날까지
끊임없이 ‘내가 왜 여기 들어왔지?’만 생각하기도 하는데
그러자면 아마도 울화병에 걸려 죽을 지경일 겁니다

‘담배만 끊어도 내 수명이 3년은 늘어날 거다’

그랬더니 재판에서 딱 3년형을 받았다고 하면서
그럴 줄 알았으면 수명이 1년만 늘어날 거라고 생각할 걸...
하면서 껄걸 웃었고 이야기를 듣던 우리도 함께 웃었습니다

한평쯤 되는 독방 크기가 집에 있는 안방 화장실만 해서
부인이 집에서 화장실에 들어가기만 하면 울었다고 합니다

그 좁은 방안에서도 운동삼아 걸어보는데
한쪽 벽에 등을 대고 출발해서 한발, 두발, 세발 걸으면
다른쪽 벽이 바로 눈앞이라 네 번째 발자국은 작게 하고,
뒤로 돌아서 다시 한발, 두발, 세발 그리고 네 번째는 작게
다시 뒤로 돌아...

그 친구는 이야기하다가 벌떡 일어나더니
이렇게 걸어다니는 시범까지 보이면서 설명을 하는데
그 좁은 공간을 상상하면서 잠시 답답해지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책이나 신문을 보아도 머릿속에는 딴 생각이 가득해서
눈은 글을 보지만 머리에는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부인이 넣어준 페이퍼백 문고판 영문소설을 보는데
익숙치 않은 영문소설을 읽으려니 집중할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니 다른 생각이 사라지고...아주 좋더랍니다
그 이후로 영문소설을 2백여권이나 읽었다고 합니다

또 징역이라는 게 ‘역(役)’을 징발하는 제도이니까
감옥에 가두어만 두는 게 아니라 뭔가 일을 하도록 강제하는데
그 친구는 8시간 근무시간(?) 동안 원예작업장에서 꽃을 키운답니다

3천평쯤 되는 꽃밭에서 꽃과 대화하고 꽃을 키우면서
자신의 마음 속에도 혼자만의 아름다운 꽃을 키웠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낮에는 밭에 나가 꽃을 키우고 밤에는 독방에서 책을 보는
주경야독의 일과를 반복하는데 아주 마음 편하다고 합니다

정말 그래 보여서 혹시 만기가 되어도 나오기 싫어하지 않을까
괜한 걱정도 했습니다^^

징역3년...
참 긴 세월이었을 것 같은데 만기출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 친구가 남은 형기를 잘 마치고 다시 세상으로 나오면
그동안 혼자 마음 속에 키운 꽃을 활짝 피우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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