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따라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53/문화일보)

해군52 2013. 4. 24. 11:10

學兵으로 끌려갔다 돌아오지 못한 삼촌 ‘물레방아 도는’ 고향 얼마나 그리웠을까

(53) 박춘석-나훈아의 ‘물레방아 도는데’

 

나훈아(본명 최홍기)가 불러 공전의 히트를 한 ‘물레방아 도는데’.

 

이는 내 고향 경남 하동군 고전면 성평리가 배경이다.그곳, 금오산(일명 소오산) 산자락은 내 유년기의 기억이 묻힌 곳이다. 객지 생활 수십 년이 지났건만 나는 이따금씩 내 고향의 꿈을 꾼다.

 

금오산 산자락 밑을 길게 감도는 주교천, 징검다리가 있고 물레방아가 있는….

 

아, 나는 눈만 감으면 지금도 천리를 단숨에 뛰어넘어 고향엘 간다. 팽나무, 감나무, 대추나무, 뽕나무가 지천으로 널려 있고 남해 삼천포 등을 잇는 ‘한려수도(閑麗水道)’가 한눈에 잡히는 곳이다.

 

내 나이 일곱 살 때 당시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패전위기에서 발악하던 일제는 당시 조선 학생들까지 모조리 사지(死地)로 내몰았다. 이 노래 ‘물레방아 도는데’의 주인공인 나의 숙부님도 그렇게 끌려갔다. 일본 도쿄(東京) 유학생이던 삼촌은 우리 집안의 희망이었다.

 

‘학병’이라는 띠를 두르고 생가마을 성평리를 떠나던 날, 고향과의 마지막 작별의 인사를 ‘돌담길 돌아서며 또 한번 보고 징검다리 건너갈 때 뒤돌아보며….’ 손을 흔드는 것으로 젊은 날을 마감했다. 주교천은 소오산 산자락을 길게 휘도는 이 지역 고전면의 모천(母川). 돌담마을 성평리 앞을 흐르는 이 주교천의 징검다리는 시냇물을 건너가기 위해 놓여져 있었고, 물레방아는 저만치 살대밑(竹田) 물방앗간에서 돌아갔다. 주교천 시냇물을 안고….

 

할아버지는 이날 이후부터 싸리문을 부여안고 아들만 기다리고 있었다.

 

“하마 오나, 하마 오나….”

 

피를 말리는 그런 세월이 3년이나 지났건만 한번 간 삼촌은 영영 올 줄 몰랐다.

 

“전쟁도 끝났다 카는데 가는 왜 못 오는고?”

 

기다림에 지쳐버린 할아버지는 어느 날, 그때 국민학생이던 나와 머슴만을 데리고 금오산에 올랐다.

 

멍석을 깔고 마련해 온 음식을 그 위에 놓았다. 할아버지는 자식의 무사귀향을 산신령께 빌었던 것이다.

 

난 그때만큼 슬픈 얼굴을 한 할아버지를 본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끝내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동네에 등꽃이 하나둘 필 무렵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바로 그 해, 감꽃이 무더기로 떨어지던 날, 삼촌은 하얀 천이 휘감긴 상자가 되어 돌아왔다. ‘순식이 삼촌’은 그렇게 젊은 날을 마감했다. 전쟁터에서 삼촌은 죽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물레방아 도는 고향산천’을 떠올렸을 것이다.

 

삼촌의 꽃상여가 주교천을 지나던 날, 나는 불현듯 삼촌이 그리워 목이 터져라 삼촌을 불러댔다.

 

“식이 삼촌, 식이 삼촌!”

 

무정한 메아리만 내 귓전을 맴돌 뿐 한번 간 삼촌이 부활하리는 만무했다. 아들을 먼저 보낸 할아버지는 이후 시름시름 앓다가 오래지 않아 세상을 떴다.

 

70줄을 넘기면서 나는 점점 고향의 의미를 느끼며 살고 있다. ‘하동포구 80리’며 ‘물새’며 ‘재첩국’이며 ‘김국’이며….

 

‘물레방아 도는데’를 작사할 무렵 나는 이미 서울사람이었다. 1972년 봄, 나는 타향살이 6년 만에 길동에다 조그마한 집을 마련했다. 본디 돈 버는 데는 젬병인 나를 따라 살며 모진 고생을 하던 아내는 집칸을 마련하자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아내는 다섯 살짜리 큰딸아이와 두 살배기 둘째딸을 위해 방을 마련해 주고 예쁜 커튼까지 쳐 주었다. 내친 김에 내 방에까지도 커튼을 쳐 주고, 또한 어항도 들여놓았다. 봄 햇살을 이고 우리 집은 정말 근사했다.

 

그러나 정작 나는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훈아를 위한 작사를 해야만 하는데, 단 한 줄의 가사도 떠오르지 않았다.

 

지구레코드사는 나훈아의 전속 기념음반을 준비하고 있어 아주 급박했다. 1968년 ‘낙엽이 가는 길’ ‘사랑은 눈물의 씨앗’ ‘바보같은 사나이’ ‘고향역’ 등을 불러 가수로 주가가 상승하고 있던 나훈아는 그 무렵 오아시스 레코드사에서 지구 레코드사로 막 전속을 옮겼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어항 속에서 돌아가는 장난감 물레방아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뽀르륵-’ 소리를 내면서 어항 속에 갇힌 금붕어는 쉴새없이 맴을 돌았다. 그 광경을 보는 순간, 나는 삼촌의 얼굴이 떠올랐다. 돌아가는 물레방아 속에서 삼촌은 부활하고 있었다. 민족의 수난과 온갖 고초의 아픈 역사를 가슴으로 껴안으면서 남의 전쟁터에 끌려가야만 했던 숙부님이….

 

순간적으로 나는 삼촌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시로 썼다.

 

“돌담길 돌아서며 또 한번 보고/징검다리 건너갈 때 뒤돌아보며/서울로 떠나간 사람/천리 타향 멀리 가더니/새봄이 오기 전에 잊어버렸나/고향의 물레방아 오늘도 돌아가는데. 두 손을 마주잡고 아쉬워하며/골목길을 돌아설 때, 손을 흔들며/서울로 떠나간 사람/천리 타향 멀리 가더니/가을이 다 가도록 소식도 없네/고향의 물레방아 오늘도 돌아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