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따라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55/문화일보)

해군52 2013. 5. 8. 11:13

서른여덟 살에 생애 마감한 월견초… 그의 익살, 한줄기 사랑으로 다가와

(55) 월삿갓의 ‘청춘을 돌려다오’

 

가을비가 흩뿌리던 날. 나는 경기 파주시 신천지 공원묘지를 찾았다. 그곳엔 작사가 월견초 대신 차디찬 비석만이 비에 젖고 있었다. ‘아, 그 사람, 월견초는 어디로 가고….’ 나는 왠지 알지 못할 슬픔이 일어 그의 비석을 안고 울고 말았다. 비석엔 가요 ‘이정표’의 가사만이 월견초(본명 서정권)의 체온을 느끼게 해줄 뿐이었다.

 

그 익살, 부리부리한 눈, 무슨 짓을 해도 밉지 않은 사내, 천재성이 번뜩이던 괴짜는 내 가슴속에 한줄기 사랑으로 다가들었다. 달만 바라보는 풀꽃 월견초(月見草)가….

 

‘청춘을 돌려다오, 젊음을 다오/흐르는 내 인생의 애원이란다/못다 한 그 사랑도 태산 같은데/가는 세월 막을 수는 없지 않느냐/청춘아, 내 청춘아 어딜 갔느냐.’

 

그의 자서전 같은 ‘청춘을 돌려다오’라는 노래시다. 1960년대 초 ‘원통해서 못 살겠네’로 작사계에 데뷔한 이후 ‘이정표’ ‘살아 있는 가로수’ ‘들국화’ ‘경상도 사나이’ ‘삼일로’ 등 많은 작품을 남기면서 작품 못지않은 숱한 일화를 생전에 남겼다.

 

부산 피란시절. 그는 ‘희미한 반야월’이란 노래시로 필화 사건(?)을 자초한다. 부산발 대구행 완행열차에 몸을 실은 그는 오징어 다리를 씹으며 소주를 마셨다. 너무 따분하기도 했지만 밤이 던지는 차창의 낭만에 취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다 그는 깜빡 졸았다. 눈을 뜨니 한적한 시골역 ‘반야월’이었다. 졸린 눈에 보인 반야월은 그에게 한 편의 노래시를 던져 주었다.

 

‘희미한 달빛에 비친 반야월역의 표시판….’

 

그런데 ‘희미한 반야월’이란 노래시가 문제였다. 대선배 작사가 반야월을 ‘희미한 사람’으로 씹었다는 것이다. 월견초는 당시 먹고살기 위해 부산의 미도파레코드사는 물론 대구의 오리엔트, 서라벌 레코드사에도 줄을 대기 위해 부산과 대구를 오가야만 했다.

 

월견초는 투덜댔다. “하필이면 반야월역에서 눈을 뜰 게 뭐꼬.”

 

그러나 엎질러진 물이었다. 다행히도 이 필화 사건은 반야월이 웃어넘김에 따라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환도(還都) 이후 월견초는 박시춘, 반야월, 나화랑, 전오승, 이인권, 조춘영 등의 매니저가 된다. 정열적이고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고 뛰어다니는 그에게 매니저라는 직함은 제격이었다.

 

하지만 한 푼만 생겨도 술잔에 돈을 쓸어 넣는 그는 언제나 빈털터리. 주머니에 먼지만 쌓였지만, 그는 늘 술에 절어 사는 재주만큼은 있었다. 그는 공짜인생을 살았다. 인현동 목욕탕에서 공짜 목욕으로 하루를 열었다. 목욕이 끝나기가 무섭게 서울 곳곳을 바람처럼 누비고 다녔다. 오라는 곳은 없어도 갈 곳은 많았던 ‘김삿갓’이 아닌 ‘월삿갓’. 밤이 되면 그의 발길은 어김없이 ‘스카라 계곡’으로 향한다. 당시 가요계에선 명보극장과 인현동 일대를 ‘스카라 계곡’이라 불렀다. ‘음악저작권협회’ ‘작가동지회’ ‘창작분과위원회’와 레코드사, 영화사, 잡지사, 인쇄소, 극장, 다방, 술집, 당구장 등이 한데 어울려 숲을 이루고 있었던 것. 그리고 장마철이면 남산의 빗물이 이곳을 지나 청계천으로 흘러내렸던 것.

 

‘늦어서 죄송합니다’는 월견초의 전매 특허. 땅거미가 채 지기도 전에 술을 좋아하던 가요작가들이 일찌감치 진을 치고 있는 술집을 그는 귀신같이 찾아냈다. 물론 ‘불청객’이었지만 ‘늦어서…’라는 말 한마디로 끼어드는 넉살이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애교와 익살 또한 넘쳤다.

 

“우리가 언제 월견초를 불렀나?” 넌지시 선배들이 농(弄)을 하면 그는 “저야, 선생님들 전속 아입니꺼-”로 맞받아쳤다.

 

이들의 술자리는 따로 악기가 필요 없었다. 술잔, 주전자, 냄비, 젓가락, 이 모든 것이 훌륭한 악기였다. 그는 효과음을 내는 데도 도사였다. ‘무정열차’와 ‘울리는 경부선’ ‘이별의 부산정거장’을 부를 때면 기적소리와 열차가 플랫폼을 미끄러지는 바퀴소리를 기가 막히게 흉내 냈다.

 

당시 월삿갓의 하루 일정을 살펴보자. 눈을 뜨기가 무섭게 맨 먼저 달려가는 곳이 ‘인현목욕탕’. 목욕을 마치면 곧바로 다방에 들른다. 그리하여 다방 마담이 갖다 주는 쌍화차를 마신다. 잣, 대추, 땅콩이 든 뜨거운 쌍화차에는 달걀노른자가 동동 떠 있다. 거기다 위스키 한 잔은 그의 단골 메뉴. 다방에서 나오면 전차를 타고 레코드사로 향한다. 선배들의 작품료며 그의 작사료도 챙기기 위해….

 

수금이 잘 되는 날은 동료들을 불러내어 당구장으로 간다. 당구 실력은 200점을 치는 게 고작이지만 그래도 300점을 놓는다. 짠돌이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 그래서인지 결과는 백전백패. 그런 그는 서른여덟 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길 잃은 나그네의 나침판이냐/항구 잃은 연락선의 고동이더냐/해지는 영마루 홀로 섰는 이정표/고향길 타향길을 손짓해 주네. 바람찬 십자로의 신호등이냐/정처 없는 나그네의 주마등이냐/버들잎 떨어지는 삼거리의 이정표/타고향 가는 길손 울려만 주네.’

 

그랬다. 월삿갓은 그의 히트 노래시처럼 ‘이정표’를 보면서 나그네처럼 훌쩍 떠난 것이다.